이번 글은 우연히 듣게 된 하와이대저택님의 유튜브 영상을 가져왔습니다.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소장하면 좋겠다는 마음에 옮겨 봅니다.
하와이대저택님의 영상을 보고 싶은 분은 아래 링크를 따라가시면 됩니다.
성인이란 아주 작은 현상을 보고 사태의 조짐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최종 결과를 안다고 하였다.
안녕하세요? 하와이대저택입니다.
책 한 권을 통째로 흡수하는 대저택 서재 이제 이 서재에서 인문학, 고전문학, 철학 장르까지 망라해 가장 수준 높은 책을 매주 두세 권씩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특히 성공하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철학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이유를 가장 완벽하게 설명한 책 서강대 철학과 최진석 교수의 저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와 함께합니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 책 보기는 아래 이미지를 따라가면 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들어 주시되 반드시 여러분 것으로 만들어 적용하시면 여러분이 원하는 것들을 이뤄내는 하루하루에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했죠'
"소크라테스와 한나절을 보낼 수만 있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을 다 주겠다"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 저자는 인류의 긴 역사를 단순화해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잡스의 말의 의미를 찾아나선 오늘의 묵직한 이야기 저자의 시선으로 풀어갑니다.
살면서 한 번쯤은 세계사를 배웠을 것이다.
세계사에는 시대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이렇게 구분 한걸까?
재미있는 일은 무슨 근거로 시대를 이렇게 나누는지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도 모른다는 것이다.
구분한 근거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답변이 너무나 싱겁다. 과연 그럴까?
생물학적으로 같은 사람이지만 생각의 틀을 다르게 가졌다는 점에선 다른 사람들이다.
이 틀은 바로 세계관이다.
역사에서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진입을 알리는 최초의 신호탄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주장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의 한 철학자도 이런 말을 던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 이전의 사람들에게 인간이 존재하는 근거는 신과 자연에 있었다.
최초에 인간은 자연과 신의 소속물이었으며 인간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란 없었다.
이후 인간이 비로소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자각되기 시작한다.
세계관이 다르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그렇게 중세인과 근대인으로 갈라진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인간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살아간다.
이 갈라짐이 획기적인 것이고 그렇게 시대가 구분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강조하려는 것이 갈라짐 그 자체가 아니다.
갈라지는 곳 앞뒤에서 각각 하나의 결로 움직이는 '인간의 무늬'가 중요하다.
쉽게 '인간의 동선'이라 하자.
미래를 준비한다 해놓고선 이 인간이 움직이는 동선을 가늠하지 않는 건 큰 실수다.
아무튼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이성의 출현은 우리를 어떻게 바꿨을까?
중세시대, 신과 자연에 귀속되었던 인간은 그 품에서 한 발작 빠져나와 '집단의 구성원'으로 이해되는 존재로 바뀐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힘을 발휘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개인보다 회사가 중요했고 나보다 우리가 중요한 시대를 거쳤다.
그렇다면 근대에서 현대로 갈라짐은 무엇이 만들었을까?
개인이다. 집단으로서의 인간이 분화되었다.
쉽게 말해 우리의 비중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비중을 두게 된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세계와 관계하는 이런 메커니즘을 혼자 있는 인간의 손에다 쥐여줘 버렸다.
이전에 인간은 반드시 여럿이서 힘을 합쳐야만 힘을 발휘했으나 이제는 작아진 컴퓨터 하나로 세계와 맞장을 뜰 수 있게 된 것이다.
손바닥 안으로 옮겨간 세계는 이동성을 확보했을뿐 아니라 어플리케이션에 힘입어 개인을 완벽하게 우위로 올려 두었다.
이제 거대 조직은 일방적으로 서비스를 주는게 아니다.
개별 인간들이 자신의 욕망과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방향이 바뀌었다는 점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게 아니겠는가?
현대를 관통하는 가장 큰 세계관은 '욕망'이다.
잡스가 어떻게 인간을 전혀 다른 유형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잡스는 지금의 인간이 무엇을 욕망하는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일을 해야,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더 행복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사람이다.
돈을 더 벌고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전에 인간의 행복에 대해 생각했다는 뜻이다.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행복, 이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는게 위대함의 출발이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구성하는 기존의 프레임을 지키고 거기서 더 나아지려 하는게 보통이다.
이 보통의 행동 양식을 벗어나서 프레임 자체를 관찰하고 프레임 자체를 달리하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유의 패턴을 가지고 자기가 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 이것이 위대함의 출발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잡스가 행복을 위한 헌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신화가 부풀려지거나 왜곡된 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폐쇄성과 비밀주의로 대표된 문화는 여전히 논란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그의 기업이 기술과 문명 변화에 따라 인간이 또 다른 인간으로 변모해 가며 다른 유형으로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거기에 적응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주목할 건 잡스의 성공이 아니라 인간이 변화해 가는 맥을 이해한 것, 그것을 집요하게 관찰한 태도다.
즉 인간이 움직이는 흐름, 인간의 동선, 인간의 무늬를 읽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성공한다.
우리는 이것을 크게 '인문', 인류의 문화라 부른다.
어느 사회나 초기 단계에서는 대개 정치학과 법학이 중심 기능을 한다.
사회가 좀 더 발전하면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이 주도적인 기능을 한다.
그 다음 사회가 좀 더 발전하면 철학, 심리학과 같은 인문학이 중심 학문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보다 더 발전한 나라는 고고학이나 인류학이 주요 학문으로 부상한다.
고고학과 인류학을 발전시킨 나라를 보면 대개 제국을 꿈꿨던 나라다.
제국은 민족적으로 전혀 다른 영역과 구성원에게까지 통치권을 확장하는 국가를 가리킨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중요한 화두가 되었던 것이 인문학 열풍이다.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문명과 인간의 흐름을 독립적으로 판단하여 미래 메시지를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개인이나 국가의 진정한 독립과 깊이 관련 있다.
한국은 오랜 기간 독립적으로 사고를 해온 경험이 많이 없다.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는 중국의 그것이었고 그다음 일본식 이데올로기 그다음 미국의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었다.
이 현상은 한국 대학의 철학 박사학위 내용이나 형식에 잘 드러난다.
박사학위 논문이 대게 자기의 세계관을 피력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세계관을 분석하고 해석한 것들 뿐이라는 것이다'
자동차를 보자.
우리는 생산하긴 하지만 처음부터 자동차라는 장르를 개척하지 못했다.
즉, 우리가 하는 것은 기존의 것을 이해 혹은 해석해 더 나은 것으로 업그레이드하려는 시도가 대다수다.
그런 한국에서 언제부턴가 상상력과 창의성을 중요한 화두로 지목하고 있다.
이건 바로 인문학적 토양에서만 가능한 작업이다.
왜? 인간의 맥을 짚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작게는 나, 크게는 세계가 움직이는 동선의 방향이 어디로 움직일지 그려보는 능력이다.
망상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방향과 관련 없는 것, 상상은 방향 바로 앞에 점을 찍고 우뚝 서보는 것이다.
아무튼 인문학이 거론되기 시작했다는 건 더 주체적인 발걸음의 증거다.
그런데 이 인문학을 주도하는 그룹은 놀랍게도 정치인도 아니고 관료도 아니며 교수도 아니다.
'기업인' 이들을 편하게 상인이라 부르자. 우리는 상인의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직업에는 없는 상인들 만의 특징, 바로 자신들이 한 판단이나 결정이 곧바로 자신의 승 패를 결정해 버린다는 것이다.
월급쟁이인 내 입장에서 이들이 상상할 수 없을만큼 돈을 잘 버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렇게 큰 부자가 또 순식간에 망해 버리는 건 더 신기하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한 번의 선택이 트리거가 되어 터지곤 한다.
매번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상인들에게는 보기 힘든 긴장감이 있다.
생과 사의 경계선에 있기에 늘 예민함이 살아 있다.
이 예민함을 유지하는 사람에게 갖추어진 '고도의 감각', 나는 이걸 '더듬이'라 부른다.
상인들은 이 더듬이를 가지고 매사 이론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라도 내가 어떻게 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대개는 정확히 안다.
논리적 분석을 따지지 않고 바로바로 판단한다. 매우 탁월한 능력이다.
'딱' 보면 안다. 이 '딱'은 바로 '감각'이다.
세상사 모든 일을 딱 보고 알아내면 그 사람은 성공하는데, 이 딱 더듬이는 예민한 감각을 유지할 때만 작동한다. 그리고 그 예민함의 기저에는 인문학, 인간의 무늬를 훔쳐보는 노력이 있다.
미국에서 랭킹 50위 100위 안에 드는 기업 CEO 중 MBA 출신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
미국의 [USA 투데이 조사]에 따르면 미국 1,000대 기업 CEO 가운데 경영학 관련 전공자가 3분의 1에 그친다고 한다.
그럼 다른 이들은 뭘 전공했나 들여다 보니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 피터 린치, 조지 소로스, 앙드레 코스톨라니, 벤저민 그레이엄, 존 템플턴, 마크 파버 등만 보아도 모두 철학 등 인문학에 심취한 사람들이었다.
실제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입학생을 상대로 한 세계 최고의 전략 컨설팅 펌 맥킨지의 입사 면접에선 합격자에게 '철학을 복수 전공하라'는 메시지를 곧바로 전달한다.
이유는 따로 없다. 입문학 출신을 갖다 놓으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예민한 더듬이는 통찰력이란 단어로 주로 표현된다.
여기 젊은 남자가 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핑크색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다.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무슨 꼴이야?' 하며 싫다 나쁘다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혹은 '신기한데? 나도 해볼까?'라며 좋다고 말하는 사람의 부류가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든다 혹은 마음에 안 든다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점으로 가보자.
느림, 게으름, 비움 단어가 들어간 제목을 가진 책들이 많다.
이 중 어떤 책은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이 아닌가?
이런 책들을 보며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드는가? 부지런히 살아도 잘될까 말까인데 '게으름이나 피우라니 이 책은 싫다.' 혹은 '그래. 난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왔어 이제 주의를 둘러보자'라며 이런 책들이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또한 마음에 든다 안 든다 둘 중에 하나인 모습이다.
만약 당신이 좋다 내지 나쁘다 둘 중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면 아직 리더로서 준비되지 않은 상태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생각이 단지 좋다 나쁘다 뿐이면 리더가 될 수 없다.
리더는 주인이 되어 끌고 가는 사람이다.
나는 좋다 나쁘다로 대답하는 양상을 정치적 판단이라고 명명한다.
인문학적 통찰은 이런 정치적 판단과 결별하는 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좋다 나쁘다는 판단은 인문학적 판단이 아닌 정치적 판단에 길들여져 있다는 증거다.
정치적 판단은 주입된 가치관을 따라서 세계와 만나거나 혹은 그것을 근거로 세계를 해석한다는 의미인데 예부터 동양에서 위대한 리더로 모신 성인은 일반인과 다른 특징을 보였다.
바로 '조짐'을 읽는 능력이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 한비자는 성인이란 아주 작은 현상을 보고 사태의 조짐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최종 결과를 안다고 하였다.
조선의 철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표현을 빌리자면, 선견지명. 즉, 무슨 일이 닥치기 전에 혼자 깨닫는 것. 먼저 아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곧 성인인 것이다.
세계에는 도도한 흐름과 방향이 있다. 문명을 이끌고 가는 힘이 있는 것이다.
큰 흐름을 비밀스럽게 보여주는 작은 일이나 현상을 우리는 '조짐'이라 한다.
우리는 이 조짐을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다. 인문학적 통찰은 '예', '아니오'로 대답하는 데서 나오는게 아니다. 질문하는 데서 비로소 열린다.
모두가 대답하려고 할 때 외롭게 혼자서 질문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리더가 되는 것이다.
인문학의 목적은 인문학적 지식을 갖추어 거기에 머무르는게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다른 이에 답을 들여다 보고 인간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아채 그 결과를 근거와 표현에 담아 잘 남긴 사람들을 우리는 '철학자'라 한다.
그런 사람들을 위주로 생각의 결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해 놓은 것을 '철학사'라 한다.
이 철학은 본디 질문의 기대고 질문은 상상력에 기댄다.
왜 상상력이 부족한가?라는 물음에 가장 원초적인 답은 질문을 시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질문을 하지 못하는가? 바로 '자기'가 없기 때문이다.
왜 '자기'가 사라졌는가?
자기가 자기를 만날 기회를 박탈당한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나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지금부터 보여지는 인간의 무늬는 점점 더 자기를 만날 줄 아는 능력에 기울어 갈 것이다.
내가 대학원 면접을 보면 으레 이런 상황이 대다수다.
"대학원에 와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요?"
"육아 철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왜 육아 철학을 공부하고 싶죠?"
"한국의 도덕 질서가 이렇게 무너지고 있는데 육아 철학을 공부해서 이 질서를 바로 세우는데 일조하고 싶어요"
나는 그럼 대답한다.
"한국의 소통 문제나 도덕 질서를 세우는 그런 무거운 사명을 도대체 누가 학생한테 부여했습니까?"
"그 어려운 일을 대체 누가 학생한테 시킨 거죠?"
그럼 학생은 당황한다. 의아한 표정으로 따지듯 나를 바라본다.
무슨 일을 하든, 일단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움직여야 한다.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어떤 성취도 이룰 수 없다.
왜? 인간의 무늬가 그리로 가고 있으니까.
각자 자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튼실한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건강하다.
다른 면접 상황을 보자.
"무엇을 연구하고 싶은가요"
"도가 철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왜? 도가 철학을 공부하고 싶죠?"
학생은 끙끙 앓더니 겨우 한마디 내뱉었다.
"저는 도덕경을 읽을 때 제일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스스로 멋적은 대답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진땀 흘리는 학생에게 나는 자신의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한 '사람'을 봤다.
어느 날은 이 학생을 본 교수 한 명이 와 이렇게 말했다.
"선배님 쟤 저렇게 공부하다 죽을지도 몰라요" "어지간이 시켜요"
놀랍게도 난 그 친구에게 공부를 시킨 적이 없다.
좋아하는 일을 통하면 확실히 보편적인 기준이나 합리적 계산 혹은 객관적 표준을 벗어난다.
누구나 숭배하는 이념을 따르지 않는다. 체계를 초월한다.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 한 명이 아닌 고유한 바로 '그 사람'으로 살아가고 그 사람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소리다.
가치 표준에 의해 인도되지 않고 자기에게만 고유하게 있는 비밀스러운 힘에 의해서 감각적인 통찰을 믿고 움직이는 힘, 이 힘을 가진 사람이 대인배고 리더이며 다음 세대에 웃음짓는 사람이다.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개념의 구조물인 이념에 지배되지 않고 피가 통하고 몸이 살아 움직이는 활동성을 위주로 한다.
우리 안에 활동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이 힘이 바로 욕망이며, 덕이며, 개성이며, 기질이며, 감각이다.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할 때 우리는 대행자가 아닌 비로소 '사람'으로 살아간다.
지금, '개인'과 '욕망'이 '집단'과 '이성'이란 이데올로기를 부수고 부상하는 과도기에서 '욕망'이라는 단어는 많은 오해를 낳고 있다.
'욕망', 부정적이고 점잖치 못한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가 이성의 신화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히랍어인 '로고스'를 기원으로 이것을 라틴어로 번역하면 '라티오'가 되고 이 말은 계산, 비례, 비율, 조화 등을 뜻한다.
'이성'을 의미하는 불어의 '레종'이나 영어의 '리즌'이 모두 여기에 기원을 둔다.
그러니까 '이성'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면 이 세계는 아주 질서 있고 논리적이다.
나에게 있는 개별적 독립성 보다는 우리에게 있는 공통의 성질이 우선권을 갖게 된다.
그 안에서 개인은 우리가 원하는 이념에 도달하기 버거워지면 바로 열등감이나 불행한 느낌 속으로 빠진다.
불안과 불행 혹은 고갈되어 가는 느낌은 바로 우리 속에서 내가 피폐해져서 가는 길이다.
30년 전만 해도 모두가 우리를 외치는게 편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냐고 그게 바로 인간의 무늬가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
오직 나에게만 있는 고유한 충동, 힘, 의지, 활동성, 감각 등을 '욕망'이라고 부르자.
어쩌면 무의식 덩어리일 수도 있다.
거친 황무지이며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힘이다. 자기 자신마저도 알아듣기 힘든 상태로, 아직 언어도 아닌 야생의 어떤 소리일 뿐이다. 개보다는 늑대에 가깝다.
욕망은 '이곳'에 있는 나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힘이고 그 모호함 마저 욕망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 이야기에 벙찐다면 아래 와 같은 질문에 체크해 보자.
지금까지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가?
해야 하는 일들을 착실하게 하면서 살아왔는가?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왔는가?
'바람직함', '해야함', '좋은 일'처럼 선명하고 뚜렷한 기준에 맞게 살았다면 당신은 단일한 기준으로 관리되었고 통제되었다. 좋은 일이 아니고 좋아하는 일이다.
자기가 바라는 내적 충동, 즉 욕망에서 출발해야 한다.
경지 정리가 매끄럽게 잘된 땅에서 누구나 심으려고 하는 작물을 심고 남들보다 더 되기만을 바라는 경쟁적인 요행을 갖지 말고 차라리 측량도 안된 황한 들판에 서서 세계와 자신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시 고민하는 자가 되어라.
편안한 어느 한 편을 선택하기보다 경계에 서서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되어라.
정형화된 성공의 공식을 버리고 내 더듬이가 예민해질 수 있는 그 자리에 우뚝서라.
자기를 대면하는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으로 까지를 제시하고 마치겠다.
"글을 써라"
글 쓰기 가운데 연애 편지가 제일 어렵다.
왜? 의욕이 넘쳐서 그렇다고 본다.
바라는게 넘쳐서, 할 말 이전에 감정이 극도로 부풀어져 폭발 직전이다.
그래서 기막히게 잘 쓴 연애 편지는 대게 대필된 것이다.
대신 쓰면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여기서 알 수 있는게 무엇인가?
글자는 영혼이 세상에 직접 강림하게 어려워 머릿속에서 몇 번 폭파한 후 팔뚝을 거쳐 팔목을 타고 흐르다가 종이 위에 떨어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응고된 것이다.
글 쓰기를 영혼의 세속화라 하겠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다.
몸 속에만 머물기 버거운 영혼이 밖으로 뛰쳐 나온 것, 그것이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는 것이 힘들면 베끼는 연습이라도 해야 한다.
자신과의 약속이라도 써야 한다. 자신과의 약속은 생각만으로 되지 않는다.
글로 쓰면 약속은 더욱 선명해진다.
인간은 오로지 글을 쓸 때 자기를 만난다.
글쓰기를 통해 자기와 대면하는 훈련을 받은 사람은 서늘한 기운을 진채 새벽 손님처럼 다가오는 삶의 문제를 부담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 문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곧 상상하는 일이고 그 문제를 붙잡고 나누었던 상상을 구체적으로 시도하는 걸 우리는 '창의성'이라고 한다. 자기가 주인으로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 사람은 반드시 예민해진다. 그는 봄이 왔다고 말하는 대신 직접 새싹을 보게 된다.
예민함이 유지되는 사람은 이성적 대답은 커녕 욕망에 기초한 질문만 해댈 것이다.
남들이 듣고는 괴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세상에 도도한 흐름을 보려 한다
그는 집중하고 유연할 것이다.
그도 잡스와 마찬가지로 철학자와 한끼 식사에 많은 돈을 지불할 것이다.
더 많은 돈이 생길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철학, 즉 인간이 움직이는 흐름을 삶의 작동과 관련시켜 볼 수 있는 사람과 구체적인 삶의 현성과 분리된 어떤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사람 사이에는 비로소 수준차이라는 것이 생긴다.
이걸 듣는 당신만큼은 반드시 전자이길 간곡히 바란다.
오늘 하루 저자의 보석 같은 인사이트를 여러분 생존에 연결시켜 볼 줄 아는 시선으로 한뼘 올라서길 바라며 영상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하와이대저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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